ESG COLUMN | 최재천 교수
ESG, 한낱 유행일까?
XITY No.1 창간호
2023.04.10
ESG 평가는 역사가 그리 길지 않은 관계로 그 기준이 확고하게 정해져 있는게 아니라 계속 더 정교하게 조율되고 있다. 기업 활동으로 인한 환경 파괴를 줄이는 노력은 당연히 해야 하지만, 자연환경을 연구하는 기초 생태학 연구를 지원함으로써 환경 개선에 포괄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
| 사진 황필주
최재천 교수
동물행동학을 연구하는 대한민국 대표 과학자. 서울대학교에서 동물학을 전공하고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교에서 생태학 석사학위, 하버드대학교에서 생물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생명과학부 교수와 국립생태원장을 거쳐 현재 이화여대 석좌교수로 있다. 생명다양성재단 대표이면서 코로나19 일상회복지원위원회 공동위원장을 거친 그는 유튜브 채널 ‘최재천의 아마존’(@choemazon)을 통해 자연과 인간 생태계에 관한 폭넓은 주제로 다양한 세대와 소통 중이다.
내년 2월 말이면 내 교수 생활도 드디어 막을 내린다. 2006년 서울대학교에서 이화여자 대학교로 옮기면서 석좌교수 임용 조건 중의 하나로 정년을 70세에 하기로 합의했다. 동료 교수들보다 5년이나 더 일할 수 있는 계약 조건이었다. 돌이켜보면 내 삶은 참으로 복에 겨운 여정이었다. 이 땅의 많은 직장인들과 달리 나는 하루 일과를 거의 온전히 내가 좋아하는 일만 하며 살았다. 연구, 강의 그리고 집필.
한 치의 불평도 허용될 것 같지 않은 내 삶에도 아쉬움은 있다. 우리말에 매우 적은 것을 비유적으로 일컫는 ‘쥐꼬리’라는 표현이 있다면, 서양 사람들은 ‘chicken feed(닭모이)’ 혹은 ‘shoestring(신발끈)’이라는 은어를 사용한다. 나는 평생 닭모이 같은 연구비를 가지고 신발끈 고쳐 매며 근근이 버텼다. 내 사회적 명성을 익히 아는 사람들은 이런 내 고백을 믿기 어려워한다. 언제부턴가 우리 정부는 국민총생산(GNP) 대비 연구개발비 비율만큼은 세계 최고라고 떠벌린다. 그러나 2021년 미국의 빅테크 기업 네 곳-구글, 아마존, 애플, 메타-이 투자한 연구개발비는 모두 169조 원으로 우리나라 전체 연구개발비 총액의 두 배가 넘는다. 비율이 중요한 게 아니라 총액이 중요하다. 1만 원의 10%는 1,000원이고, 1조원의 10%는 1,000억원이다. 게다가 이 쥐꼬리만 한 연구비를 우리는 금방 돈이 될 듯한, 혹은 돈이 될 것이라고 떠드는 연구에만 쏟아붓는다. 까치, 긴팔원숭이, 돌고래의 꽁무니나 따라다니겠다며 내미는 내 손은 너무나 자주 매정한 뿌리침을 당했다.
이런 내게 몇 년 전부터 기업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ESG의 등장으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바라보는 관점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이윤 창출이 곧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프리드먼주의(Friedman doctrine)가 막을 내리고 기업의 활동이 사회에 이익이 되도록 하는 ‘사회책임투자(SRI, Socially Responsible Investment)’가 중요한 시대가 됐다. 환경(Environmental), 사회(Social), 지배 구조(Governance)의 머리글자를 딴 ESG는 기업의 비재무적 성과를 측정하는 지표로서, 매출 규모와 영업 이익 등 전통적 재무 성과 외에 사회적 책임 이행을 고려해 기업의 지속 가능성을 평가한다. 새로운 밀레니엄이 열리던 2000년 영국을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에서 연기금 운용에 ESG 평가 정보를 의무적으로 공시하도록 제도화하면서 시작된 ESG 열풍. 2016년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Blackrock)의 최고경영자 래리 핑크(Larry Fink)가 기업의 재무적 성과만을 판단하던 전통 방식을 탈피해 장기적 관점에서 기업의 가치와 지속 가능성에 영향을 미치는 비재무적 요소들도 충분히 평가하겠다고 선언하며 뜨겁게 달아올랐다. 우리나라 코스피 상장 기업도 2030년부터 의무적으로 ESG 정보를 공시해야 한다.
나는 우리 기업들이 ESG에 대해 뜻밖에 진지하다는 점에 기분 좋게 놀라고 있다. 개중에는 대놓고 이른바 그린워싱(greenwashing), 즉 하는 척 시늉만 내려는 기업도 더러 있지만 내게 자문을 구하는 기업 대부분은 퍽 진지하게 준비하고 있다. ESG 바람이 그냥 스쳐 지나가는 한낱 유행 따위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반갑다. 세계적 자산 운용사들은 이미 1970년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 정책에 반대하며 대대적인 투자 철회 운동을 경험한 바 있다. ESG 경영 평가는 그때보다 훨씬 더 조직적이고 전방위적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며 기후 변화와 생물 다양성 고갈 등 환경 위기에 대한 관심은 역대 최고 수준으로 고조되어 있다. 인권과 소비자 보호에서 동물 복지까지 아우르는 사회적 가치와 정당한 이윤 배분 및 투명한 지배 구조 등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이제 더 이상 시민들의 밝은 눈을 피할 길 없어 보인다. “100년 기업도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라는 말이 요즘처럼 실감 나는 때가 또 있었을까?
해외 기업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국내 기업들이 ESG에서 가장 어려워하는 요소는 환경(E) 부문이다. 사회(S) 부문에 관해서는 우리 기업들도 그동안 장학금 지급을 위해 제법 많은 재원을 출자했고, 찬바람이 불기 시작할 무렵이면 달동네를 찾아가 연탄 배달도 해봤다. 이런 행동들이 사회 부문 평가 항목의 전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경험이 있다고 생각하고 서서히 확대해 나가면 될 것이라 판단하는 것 같다. 지배구조(G) 개선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기업의 소유주나 경영진이 결단하면 언제든 획기적으로 달라질 수 있는 문제라 특별한 정책적 준비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이와 달리 그동안 기본적으로 환경을 파괴하며 수익을 창출해 온 대부분의 기업들에게 하루아침에 환경을 파괴하는 행위를 멈추거나 더 나아가 환경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선회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ESG 평가와 관련해 기업을 자문하며 나는 새로운 움직임을 읽는다. ESG 평가는 역사가 그리 길지 않은 관계로 그 기준이 확고하게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계속 더 정교하게 조율되고 있다. 기업 활동으로 인한 환경 파괴를 줄이려는 노력은 당연히 해야 하지만, 자연환경을 연구하는 기초 생태학 연구를 지원함으로써 환경 개선에 포괄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 일례로 포스코인터내셔널은 2021년부터 이화여대 영장류보전및생태연구소(PRInCE, Primate Research Institute for Conservation and Ecology)가 인도네시아 구눙할리문살락국립공원(Gunung Halimun-Salak National Park)에서 진행하고 있는 자바긴팔원숭이(Javan gibbon) 현장 연구를 지원하고 있다. 이는 우리 정부의 고질적 기초과학 홀대를 기업이 구원하는 좋은 선례가 되며 ESG 평가에도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실제로 한국ESG 평가원은 2022년 포스코인터내셔널의 ESG 활동을 E 부문에 S와 G의 A+에는 약간 못 미치지만 A등급을 주며 종합 등급을 ‘A+, 매우 우수’로 평가했다.
“
ESG 평가는 역사가 그리 길지 않은 관계로 그 기준이 확고하게 정해져 있는게 아니라
계속 더 정교하게 조율되고 있다.
기업 활동으로 인한 환경 파괴를 줄이는 노력은 당연히 해야 하지만,
자연환경을 연구하는 기초 생태학 연구를 지원함으로써
환경 개선에 포괄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
”
1960년 제인 구달(Jane Goodall)이 탄자니아 곰비국립공원(Gombe National Park)에서 야생 침팬지 연구를 시작하며 주목받기 시작한 영장류 연구는 인지과학과 뇌과학의 눈부신 발달에 힘입어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자국 영토에 영장류가 서식하는 일본을 제외하곤 영장류 현장 연구를 하려면 열대와 아열대 오지로 가야 한다. 자연스레 연구비 확보가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는 바람에 지금까지 영장류 연구는 소수의 선진국이 독점하고 있었다. 영장류가 서식하고 있는 오지를 방문해서 관찰 연구를 하려면 거의 예외 없이 미국, 영국, 독일, 네덜란드 그리고 일본 연구진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어렵게 허락을 받아 연구를 진행하게 되더라도 연구 과정 단계마다 그들에게 보고하고 승인을 얻어야 하며 많은 경우 연구 결과도 공유해야 한다.
우리 연구진은 2006년 인도네시아에서 자바긴팔원숭이 개체군을 발견하고 현지 연구원에게 누가 그들을 연구하고 있느냐 물었다. 돌아온 답변은 뜻밖이었다. 독일과 일본 연구진이 몇 차례 다녀갔으나 지속적으로 하고 있지는 않다는 답변이었다. 몇 번을 재차 확인한 다음 우리는 연구에 뛰어들기로 결정했다. 현장 연구에 착수하고 얼마 되지 않아 우리는 왜 독일과 일본 학자들이 포기할 수 밖에 없었는지 깨달았다. 구눙할리문살락국립공원은 해발 983미터에 달하는 고산지대에 위치해 지형이 주로 계곡과 능선으로 이뤄져 있다. 긴팔원숭이는 다리보다 긴 팔을 이용해 주로 20~30미터 높이의 숲우듬지(canopy)를 따라 이동하는데 우리는 계곡과 능선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뒤를 쫓아야 한다. 이런 악조건에 굴하지 않고 우리 연구진은 6개월 만에 긴팔원숭이들을 습관화(habituation)하는 데 성공해 15년째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이제는 어느덧 자바긴팔원숭이에 관한 한 다른 나라의 연구진이 우리 허락을 받아야 하는 수준에 이르렀으나 안정적인 연구비 확보는 늘 어려웠다. 기업 평가에서 ESG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 것은 자연을 연구하는 기초과학 분야에 소중한 단비를 뿌려주는 일이다.
2021년 남양유업은 불가리스의 코로나19 예방 효과를 둘러싼 논란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자 급기야 홍원식 회장이 직접 대국민 사과와 더불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며 자녀에게도 경영권을 승계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회사의 성장만을 바라보면서 달려오다 보니 구시대적인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소비자 여러분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라는 홍회장의 회한은 기업 경영의 새로운 지평이 열리고 있음을 완벽하게 함축한다. 그러나 남양유업은 처음에 했던 약속과는 달 리 기업의 이미지를 개선하려는 노력은 커녕 사모펀드 회사와 주식 매매 계약 이행을 둘러싸고 법정 소송에 휘말려 있다. 남양유업이 소비자의 마음을 되돌리려면 사회 부문에서 성의를 보이는 정도로는 부족하다. 환골탈태 수준의 지배 구조 개편은 물론이고 언급조차 하지 않는 환경 분야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ESG의 첫 단추는 단연 환경(E)이다.
writer CHOE JAECH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