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TIME JOB |
돈보다 행복을 버는 N잡러의 슬기로운 퇴근 생활
XITY No.0 예비창간호
2023.04.17
좋아하는 일을 한다고 해도 ‘업’이 되면 스트레스다. ‘투잡’은 단어만으로도 삶이 더 고달플 것 같아 안타까운 기분마저 든다. 한데 ‘N잡러’는 뭔가 다르다. 직장인 10명 중 9명이 “본업 외에 다른 일에 관심이 있다”고 할 정도니, 가장 핫한 키워드 아닐까. 돈을 더 벌기 위해서, 아니면 노후 준비를 위해서도 아니다. 주도적 삶을 살기 위해 N개의 일을 택한 사람들.
N잡러를 꿈꾸는 젊은 세대에게 “당장의 수익에 연연하지 말고 꾸준히 하다 보면 본인의 가능성이 확장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는 진지한 조언을 건네는 임남택 변호사 | 사진 황필주
N잡러를 만나다 | ‘웹툰작가는 평생 직업’ 만화 그리는 변호사, 임남택
취미로 시작한 일이 또 하나의 직업이 되어버린 사람. ‘만화 그리는 변호사’로 유명한 임남택 변호사는 N잡러 사이에선 꽤 알려진 인물이다. 변호사는 격무로 유명한 직군. 의뢰인 삶의 한 조각을 이어받아 이에 공감하고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하는 데까지 의뢰인과 호흡을 같이한다. 그 와중에 각종 송사 사건 서류작업도 병행해야 한다. 당사자에게는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기에 그 어느 것도 소홀히 할 수 없다. 여러 사람의 삶에 관여하는 변호사라는 직업 자체는 어쩌면 본질적으로 N개의 역할이 요구되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바쁜 하루를 쪼개 변호사로 활동하는 와중에 밤에는 법률 내용을 소재로 웹툰을 그리는 그는 변호사 8년 차, 웹툰작가 5년 차다.
임남택 변호사가 만화로 표현한 본인의 모습 Ⓒ임남택
만화광(狂), 법률 만화로 세상을 밝(光)히다
어린 시절부터 만화를 보고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수험생활을 하면서 처음 접한 법학이 어렵게 설명되어 있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끼며 ‘나중에 법조인이 되면 꼭 알기 쉽게 만화로 법률을 풀어 전달하겠다’는 꿈을 가슴 한편에 갖게 되었다.
“학부 시절에 사법고시를 준비하면서 법학이 너무 어려웠습니다. 한데 법학을 공부해보니 세상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하고 유용한 학문이었습니다. 법은 너무나도 필요한데 사람들은 송사에 휘말리거나 수험생활을 할 때만 비로소 법을 접하게 되는 현실이 안타까웠습니다.”
《먼나라 이웃나라》를 비롯해 《세계사 만화》 등 만화를 통해 역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어린 시절. 대학에 와서도 역사학을 전공한 그는 사법고시를 준비하며 공부가 어려워서 그랬는지 말 그대로 ‘법학을 쉽게 설명해주는 만화가 있었으면 좋겠다’ 하는 다소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만화 보는 것을 좋아하고, 그리는 것도 좋아하고, 주변에서 그림 실력이 조금 있다는 평도 받았던 터. ‘나중에 법조인이 되면 어렵고 무섭기만 한 법을 만화로 쉽고 편하게 풀어 써보자’고 내내 다짐하며 공부를 해나갔다.
“만화 연재를 하겠다는 마음은 항상 가지고 있었는데, 막상 변호사가 되고 보니 업무와 병행하는 것이 쉽지 않더라고요. 더욱이 신입 변호사 시절엔 회사에 고용된 신분이기에 업무와 다른 것을 병행한다는 자체가 스스로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연재를 차일피일 미루던 어느 날 아내가 아이를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기쁜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아이가 태어나면 지금보다 더 만화를 그릴 시간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웃음). 때마침 마땅한 연재처도 찾은 터라 바로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정식으로 웹툰작가가 된 이후부터 N잡러의 삶을 살게 된 임남택 변호사. 촬영을 위해 변호사 사무실에서 웹툰 그리는 장면을 연출했지만 현실에선 이마저도 쉬운 일은 아니다. | 사진 황필주
변호사와 웹툰작가, 둘 다 소홀 못 하는 ‘천직’
현실적인 N잡러의 삶은 고되지만 보람을 준다. 그의 말처럼 아내의 출산을 앞두고 연재를 시작했고, 아이가 태어난 이후에는 변호사 업무, 웹툰 연재, 육아까지 세 가지 일을 동시에 하게 되었다. 다행히 변호사 일이라는 게 여느 직장인처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꼬박 사무실에 갇혀 업무를 소화해야 하는 것은 아니기에 가능했는지 모르겠다.
“적절하게 시간 배분이 가능한 유연성이 있는 업무이니 웹툰작가 일을 병행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다만 변호사 업무 자체가 의뢰인의 개인적인 삶을 어느 정도 넘겨받아서 해결하는 일이기에 항상 수임한 사건에 대해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습니다. 의뢰인 입장에서도 본인 사건을 담당하는 변호사가 웹툰을 그린다고 하면 사건에 소홀할 수도 있다는 걱정을 하는 것도 사실이겠고요. 그래서인지 개업하고 나서는 더더욱 맡은 사건이나 업무를 다 해결하고 남는 시간에 웹툰을 그리고 있습니다. 사실 굉장히 좋은 태블릿을 사서 변호사 사무실에 가져다놓았는데, 거의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개업하고 나서 오히려 N잡러로서 효율은 떨어졌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웃음).”
N잡러의 큰 고충 중 하나는 시간 배분. 개업한 변호사라면 시간 배분은 더더욱 힘들다. 변호사와 웹툰작가, 거기다 육아까지. 온·오프가 따로 없는 역할을 어떻게 다 수행할지 처음에는 막막했을 터. 그런데 그게 되더란다. 주말 내내 밤을 새우고 에너지드링크를 몸에 달고 살지만 어떻게든 다 해내서 지금까지 의뢰인과 마찰은 없었고 연재 마감 시간도 지킬 수 있었다.
“올해 아이가 다섯 살이 되었는데 키가 제법 크고 있습니다. 만화 장비에 손을 댈까 봐 전동책상을 사서 높게 올려 아이 키에 닿지 않도록 해놓기도 했지요. 퇴근 후에는 아이를 봐야 하니 주로 아이가 잠들고 나서 만화를 그려왔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크다 보니 그것마저 쉽지 않아 요즘에는 아이가 잘 때 같이 잠들었다가 새벽 서너 시쯤 일어나서 맑은 정신에 작업하곤 합니다. 사실 웹툰 연재는 펜선을 입히고 색칠하는 것 외에도 연출 구상하는 일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구상 업무는 거창한 작업대까지는 필요 없어서 아내에게 양해를 구하고 조용한 카페에 태블릿 들고 가서 서너 시간 정도 일하고 오기도 합니다.”
태블릿으로 구상한 아이디어의 초안, 중간 과정, 완성 그림 Ⓒ임남택
경제적 이익보다 더 큰 보람 주는 삶
N잡러에서 말하는 ‘잡(Job, 직업)’은 물질적 수익을 어느 정도 얻을 수 있는 일이어야 한다. 웹툰 연재를 통해 일정한 수입을 얻지만 그의 주 수입원은 여전히 변호사 업무다. 웹툰작가가 될 수 있었던 이유도 변호사라는 본업 덕분이기에 절대 소홀할 수 없다.
“법률 내용을 웹툰으로 담을 수 있는 기회 자체도 법을 알고 또 변호사라는 직업을 가졌기에 얻을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렇다 보니 변호사 업무를 최우선으로 하고 있습니다. 사실 웹툰작가로서 수입은 굉장히 제한적입니다. 다만 기업에 연재한 경우에는 아무래도 보수 체계가 갖춰진 집단이라 어느 정도 수입을 얻을 순 있습니다. 한데 무급으로 연재한 경우도 꽤 많은데 이것도 나름 무형의 자산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법률 만화를 그리는 만화가’라는 명성을 조금씩 얻다 보니 여러 곳에서 연락이 와서 관련 프로젝트를 한 적도 있다. 얼마 전엔 부천에서 열린 웹툰협회 모임에 초빙이 되었고 해당 협회에도 정회원으로 가입했다. 그 과정에서 웹툰작가들에게 원고료 미지급 등 간단한 사건에 대해 법률적 조언도 줄 수 있었다. 이런 사소한 기회들이 웹툰을 그리기 때문에 얻을 수 있었던 ‘또 다른 긍정의 경험’이라며 꽤나 흡족해하는 얼굴이다.
“사실 아웃풋에 비해 고생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그린 만화를 누군가가 읽어주고 ‘유익한 만화를 그려줘서 고맙다’고 얘기해주면 힘이 나서 계속하게 됩니다. 제가 그린 웹툰 기사에 달린 댓글을 다 읽는 편인데, ‘잘 보았고 관련 법리를 이해했다’는 댓글을 발견하면 밤새운 보람을 느낍니다.”
‘법툰’ 제작에 그치지 않고 무료 소송으로
“웹툰은 매스미디어에 연재가 되므로 조회수가 올라가면 독자 중 최소한 몇 명은 도움을 받을 가능성이 생깁니다. 그런 점에서 웹툰이라는 매체에서 작가로 활동하는 것에 보람을 느낍니다.”
웹툰 연재 외에도 아이폰 분실 신고 소송을 도와주고 있다는 그는 아이폰 유저들 사이에선 수호신이나 다름없는 선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최근 몇 년 사이, 아이폰을 중고로 거래하는 일이 잦은데 중고로 판 다음에 분실 신고를 허위로 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 실제로 그것 때문에 ‘내 휴대폰 벽돌 됐다’는 사람이 많아졌고, 임남택 변호사도 피해자 중 한 명이 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도 맞닥뜨렸다. 그는 법적 지식을 활용해서 통신사를 상대로 ‘분실 신고를 풀어달라’는 소송을 해서 이긴 적이 있는데, 이때 동일한 문제를 겪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에 변호사와 웹툰작가 두 가지 직업을 컬래버하는 작업을 행동으로 옮기게 됐다.
“휴대전화 가격이 소송하기엔 애매한 부분이라서 변호사를 선임하기도 사실상 어렵고, 승소의 실익도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이폰 분실 신고를 푸는 방법을 만화로 그려서 인터넷사이트에 올리고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을 달라는 글을 남겼습니다. 지금까지 약 20~30명의 소송을 무료로 도와주었습니다.”
실제로 변호사 사무실에서 임남택 변호사가 그린 웹툰. 그의 책상에는 임 변호사가 그동안 연재했던 웹툰을 모은 책 <알아두면 유용한 퇴근길 법툰>이 놓여 있다. Ⓒ임남택
N잡러는 내 안의 가능성을 확장해주는 것
당장 돈이 안 되는 것이면 어떤 일이든 도전이 쉽지 않다. 그런데 그는 변호사로서 법원에 나가기 힘들게 되거나 늙더라도 웹툰작가는 평생 직업이고, 은퇴 없이 죽을 때까지 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업계뿐 아니라 보다 넓은 세상에서 ‘독특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뿌듯한 믿음. 그러하기에 “두 가지 일이 정말 좋다”는 그는 N번째 직업이 단순히 돈벌이 수단이 아니라 자아 실현의 과정이며 평생의 업이라는 생각이다.
“젊은 세대는 N잡러가 되는 이유 중 하나가 경제적 수익이 큰 것 같습니다. 저는 돈보다는 자아 실현 내지 공익적 가치를 위해 시작했기에 조금 다른 경우인 것 같고요. 당장의 금전적인 이익이 보장되지 않더라도 N잡러를 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일을 하고 경험하는 것을 피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습니다. 머지않은 시간에 그 자양분은 본인의 일의 지평을 넓혀주고 업무 역량을 개발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눈앞의 이익에만 집착하다 보면 열정과 동력은 쉽게 지치기 마련이니까요.”
법의 대중화를 위한 노력은 계속된다
통상 N잡러라고 하면 본업과 N번째 직업 사이에 적잖은 간극이 있다. 그런데 그는 변호사라는 직업의 연장선에서 웹툰작가로 활동하고 있기에 다른 N잡러보다는 밀접하다. 자신이 아는 법률지식이 남에게도 너무나 필요할 것 같다는 깨달음. 어려운 법률 내용을 알기 쉽게 만화라는 또 다른 언어로 번역해 세상에 알리는 일은 그 사이 간극은 크게 없다 해도 결코 녹록한 일이 아니다. 창작 작업은 시간과의 싸움이기에 잠도 휴식도 많이 포기하고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더 많은 부분마저 희생해야만 가능하다. 그런데도 기분 좋은 피곤함으로 두 가지 일을 병행하는 그의 열정을 마주하고 나니, 세상 일에 이렇게 진심인 사람이 또 있을까 싶다. 소수 의뢰인에게만 도움 주는 것을 넘어서, 불특정 다수에게 도움을 주고 이들이 송사에 휘말리는 것을 미연에 방지할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 같다는 그의 말. 뭉클한 감정으로 전달되는 순간이다.
“말로 표현하기 쉽진 않은데 변호사로서 역할은 어떤 일에서 특정 의뢰인의 사건을 해결해주는 것입니다. 의뢰인을 넘어 일반 사람들에게 문제가 생기지 않게 해주려면 정치계에 입문하거나 사회운동을 해야겠지요. 애초에 의뢰인들이 왜 변호사를 찾아오는지를 생각해보면 상당 부분은 법에 대해 잘 모르고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비로소 법이 있고 법적 문제가 생겼음을 알게 되는 게 현실이지만, 우리 주변에는 항상 법리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법을 멀게 생각하지 않고 내 가까이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인식을 갖고 보다 쉽게 접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들이 갖고 있는 법에 대한 두려움을 ‘법툰’을 통해 없애고 싶다는 그는 가령 간단한 소송 같은 경우는 스스로 찾아서 할 수 있을 정도였으면 좋겠단다. 다시 말하자면 법에 대해 적극적인 자세를 갖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는 것. 일반 사람들이 법을 너무 잘 알게 되어서 사건을 미연에 방지해 변호사를 고용할 필요가 없는 세상. 그렇게 되면 웹툰작가는 본업, 변호사는 어쩌다 수임하게 되는 부업이 되더라도 꽤나 만족할 것 같다고 한다. 그의 사람 좋은 내음이 N잡러의 진정한 가치이자 행복일 것 같다.
기사 전문은 <XITY> 매거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ditor KIM DONGW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