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AFICIO GLOBAL CITY |
마닐라의 숨겨진 보석 보니파시오
XITY No.2
2023.08.07
| 사진 황필주, 이수호
지난 1월 필리핀 관광부는 한국인 13만 1,314명이 필리핀을 방문, 팬데믹 이후 선두 시장이던 미국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고 밝혔다. 이후 매달 30%대의 점유율을 보이고 있다 보니 필리핀 어디를 가든 한국 여행자가 넘쳐난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세부나 보홀, 보라카이 등 해양 액티비티가 넘쳐나는 곳과 달리 수도 마닐라는 카지노 외에 사실 즐길 거리가 많지 않다. 스페인 식민지 시대를 경험하는 ‘성벽 도시’ 인트라무로스가 대표 명소인데, 성 어거스틴 성당과 마닐라 대성당, 상류층 사람들의 삶을 엿보는 카사 마닐라 박물관, 군사 요충지에 세워진 포트 산티아고 등은 반나절이면 충분히 둘러볼 수 있다. 그렇다 보니 마닐라 근교 여행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는데, 도심에서 3시간 떨어진 팍상한 폭포(Pagsanjan Falls)는 여행자들 사이에서도 만족도가 가장 높다. 91m의 높은 절벽에서 시원하게 쏟아져 내리는 절경이 일품인데 한 번쯤은 꼭 방문할 가치가 있다. 문제는 팍상한 폭포가 마닐라 여행의 종착지 같다는 아쉬움이다.
게다가 마닐라는 스마트시티 지수도 우리나라 대표 도시보다 많이 뒤처져 있다. 몇 년 전에는 서울시에서 공공 와이파이와 지능형 사이버 보안체계 등의 노하우와 사례를 전수할 정도였다. 당연히 IT 강국 한국인에겐 여행 내내 불편할 수밖에 없다. 유심칩을 구입했어도 인터넷 시그널이 도시 곳곳에서 늘 불안정하다 보니 유일하게 와이파이가 ‘빵빵’ 터지는 호텔을 벗어나면 세상과 차단되는 것만 같아 답답할 지경. 그렇다고 드라마 ‘카지노’에서처럼 차무식에게 돈을 빌려 게임에만 주야장천 올인할 수는 없지 아니한가. 그런데도 마닐라를 다시 찾는 이유에 대해 묻는다면, 그 어떤 동경만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은 아니라고 답하고 싶다. 빤한 이동 반복에 그치는 여행이라도 좋다. 바삐 둘러보지 않아도 되고, 무언가를 체험해야 하는 압박도 욕심도 없다면, 도시는 의외로 그 이상의 것을 보여줄지도 모른다. ‘여행은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것’. 모든 것을 내려놓고 도시를 천천히 걷는 여행자에게만 보여주는, 깊숙한 뒷골목에서나 발견되는 보석과도 같은 선물이 이곳 마닐라에도 분명 있다.
| BGC 하이스트리트의 공원
우리가 알던 마닐라가 아니네?
한국인이 가장 선호하는 여행지이면서도 은퇴 후 이민과 영어 교육을 위해 많이 찾는 도시. 한때 어린 학생들의 영어 연수 붐이 인 적이 있었는데, 불안정한 치안 때문에 조금은 꺼려 하지 않았을까도 싶다. 그런데도 영어권 나라보다 이동거리가 짧고, 경비가 저렴하다는 이유로 선택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한데 이유는 따로 있었다. 필리핀에 서울 강남 못지않은 동네가 있다는 걸 왜 이제야 알았을까. 마닐라 비즈니스 중심지인 마카티, 올티가스와 인접한 ‘보니파시오’는 우리 신도시보다도 쾌적하고 무엇보다 안전하기까지 하다. 마닐라 공항에서 약 15분 거리의 신비즈니스 중심지로 10여 년 전부터 기대를 모았던 보니파시오는 메트로 마닐라를 관통하는 고속도로가 인접해 있고, 세계적인 IT 콜센터와 아웃소싱 기반 산업이 활성화돼 다국적 기업이 둥지를 튼 지 오래다. 그렇다 보니 한국인을 포함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들이 모여 살고 있고, 대치동 엄마들도 부러워할 만한 한국, 영국, 일본 등 5개국의 다양한 커리큘럼을 자랑하는 국제학교가 있다. 지금은 동남아 최고 학군으로 손꼽힐 정도.
한데 마닐라 국제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보니파시오로 가는 길은 예상보다 더딘 난항의 연속이었다. 동남아 지역에서도 손에 꼽히는 교통체증 도시, 마닐라에선 평일 낮인데도 15분 거리를 이동하는 데 두 배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도로 사정과 신호체계 문제 때문인지 더운 택시 안에서 땀 흘리며 갇혀 있어야 했다. 참고로 마닐라 택시는 외형은 그럴싸한데 차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생각보다 오래된 연식임을 확인하곤 당황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가죽은 고사하고 비닐(레자)도 아닌 카시트. 우리나라 1980년대 시대극에나 등장할 법한 천으로 덧씌운 것을 보면 지나치게 청결한 승객이라면 앉아도 되나 싶은 생각도 들 것 같다. 대부분 오래된 스틱차이다 보니 안정적인 승차감은 기대하기 어렵고, 무엇보다 큰 문제는 매연을 일으키는 주범이라는 것. 공항에서 15분 거리로 예상했다가 1시간 가까이 소요되자 무모한 일정이 아니었나, 후회가 밀려드는 순간 현대적인 자태로 화려하게 펼쳐진 마천루가 신기루처럼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주 오래전 LA에서 자동차를 몰고 3시간 남짓, 어둡고 길고 긴 터널 같은 사막 도로를 운전한 적이 있었다. 온몸이 비틀릴 정도로 지루하고 피곤할 즈음, 저 멀리 화려한 네온사인의 라스베이거스가 눈앞에 다가왔을 때의 벅찬 반가움! 보니파시오를 앞에 두고 그 비슷한 감정이 드는 건 왜일까.
| 익숙한 글로벌 IT 기업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는 보니파시오 글로벌 시티. 앞 글자만 따서 ‘BGC’라 부른다. 대한민국을 포함한 여러 국가의 대사관도 이곳에 위치해 있고, 필리핀 내 최고 시설을 자랑하는 종합병원 세인트룩스 메디컬센터, 대형 쇼핑몰과 공연장, 컨벤션센터, 호텔과 레지던스 등 똑똑한 도시 기능을 알차게 갖춘 형태다. 교육, 의료, 상업 등 완벽한 조합은 마닐라 최고의 주거 환경으로 10여 년 전부터 많은 투자자들의 관심을 받아왔다. 수많은 오피스 건물에는 다국적 기업이 들어서 있고, 유명 글로벌 체인 호텔과 레지던스 아파트까지. 마치 미국의 뉴욕과 시카고, 시애틀 같은 도시와 절묘하게 닮아 있다. 그래서일까. 엔데믹이 시작한 이후 수많은 외국인들이 보니파시오에서 ‘한 달 살기’ 콘셉트의 제법 긴 체류를 하고 있다는 후문.
스마트시티 시범 특별자치구역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BGC 안은 모든 게 딴 세상이다. 지능형 교통체계, 에너지 관리 시스템, 공공 안전 시스템 등의 최첨단 기술로 촘촘하게 채워져 있다는데, 그간 스마트시티 프로젝트를 추진한 결과물이다. 특히 마닐라의 고질적인 문제인 교통체증을 해결하기 위해 자전거 전용 도로를 만든 것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BGC 안에서는 전동 킥보드 주차 시스템 및 공유 차량 카셰어링 등 교통 체증을 극복하기 위한 공유 경제가 어느새 활성화된 분위기. 특히 스마트폰 QR코드로 신속하게 음식 주문을 하는 것을 넘어, 앞으로는 AI와 사물인터넷(IoT), 빅데이터 분석 등 최신 기술을 활용해 스마트시티 지수를 계속해서 상승시킬 전망이다. 필리핀 사람들 대부분이 아직도 현금 사용을 선호하는 것과 달리 BGC는 마닐라의 스마트시티 시범 특별자치구역이었던 셈이다.
높은 빌딩 숲속 한가운데 자리 잡은 도심형 농장, 어반 파머스(Urban Farmers)는 그야말로 샘이 솟고 풀과 나무가 자라는 오아시스였다. 다양한 작물을 자동화 시스템으로 재배하는 것을 들어서기도 전에 눈치챌 수 있었다. 어반 파머스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면 식물 재배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해, 도시 농업의 효율성과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방법을 연구한 흔적도 발견할 수 있다. 무엇보다 지역 주민과의 소통을 중요시하는 어반 파머스는 SNS를 통해 건강한 도시 농작물에 대한 정보를 널리 알리는 일에도 소홀함이 없다. 주민이 가볍게 공원을 찾듯, 수시로 이곳을 방문하게끔 도시 농업 활성화에 관한 여러 의견과 정보를 공유하는 이벤트도 정기적으로 열고 있다. 또한 인근에는 수를 헤아리기도 어려울 만큼 공원과 녹지를 충분히 갖추고 있는 점도 인상적이다. 게다가 공원에서는 휴식만 취하는 게 아니다. 일부 공원 시설은 앱으로 예약해 사용할 수 있으며, 자전거와 전동 킥보드도 손쉽게 대여가 가능하다. 특히 BGC의 하이스트리트는 가장 핫한 곳으로서, 필리핀 대기업이 야심차게 개발한 복합문화구역이라 할 수 있다. 크게 4개 구역으로 나뉘어 있는데, 쇼핑몰과 레스토랑, 퍼브, 뷰티숍, 애완동물숍까지 구경할 거리가 차고 넘친다. 도시의 안전과 편의를 위해 친절하게 갖춘 스마트 인프라 시설도 눈에 띈다. 스마트 가로등, 스마트 주차장, 스마트 길안내판 등이 그것. 지난 4월 필리핀 선출직 공무원 800여 명은 인천 송도를 방문해 첨단 ICT 기술이 접목된 미래 스마트시티를 체험했다. 이는 필리핀이 미래 스마트시티에 관한 관심이 높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미래 지향 기술을 적극적으로, 차례로 도입하는 마닐라에서 웹드라마 ‘카지노’ 시즌 2가 다시 제작된다면? 전편과는 완전히 다른 도시의 모습이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기사 전문은 <XITY> 매거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ditor KIM JAEWOO Assistant KIM CHEOLY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