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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물포 르네상스, 원도심이 돌아온다



XITY No.4

2024.04.26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인천상륙작전의 주역인 맥아더 장군이 UN 사령관직에서 물러나면서 남긴 말이다. 그렇다. 오래된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마냥 사라지기엔 아까운 것이 많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충분히 조화를 이룰 수 있다 .

도시 역시 마찬가지다. 무역의 중심지였던 인천 항구도시는 지난 몇 년간 새로운 변화에 직면했다. 그렇다고 마냥 부수고 없앨 수는 없기에 조화를 이룬 재생사업이 조명받고 있다. 독일 함부르크가 그랬고,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이 그랬다. 

이제 인천 차례다.



일본과 청나라의 초계지
일본과 청나라의 초계지

‘최초’의 타이틀을 가장 많이 갖고 있는 도시를 아세요?


19세기 말 조용한 포구가 격랑에 휩싸였다. 1883년 개항과 함께외세에 의해 제물포항이 개방되면서다. 1876년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개항을 강요했다. ‘조일수호조규’에 따라 부산과 원산 그리고 인천이 개항됐다. 한반도를 노리던 일본은 철저하게 준비했다. 정식 개항 1년 전인 1882년 영사관을 지었다. 이후 일본 영사관을 시작으로 청나라, 러시아 영사관이 속속 들어섰다. 이들은 영사관을 중심으로 치외법권 지역인 조계지를 설정했다. 이후 서구 열강도 조계지를 차지하면서 인천은 열강의 각축장이 됐다. 일본 조계지는 약 1만 평으로 청나라의 두 배였다. 지금도 개항장 거리에 가면 일본과 청나라의 조계지가 일본과 중국의 문화를 간직한 채 어색한 동거를 하고 있다. 서구 열강의 조계지는 총 14만 평 규모로 외형상으로는 크지만 가장 요지는 일본이 선점했다. 이권의 침탈을 두고 논의하던 자리가 우리나라 최초의 사교클럽이었던 제물포구락부였고, 제물포구락부는 열강의 한반도 침탈을 상징한다.


개항 이후 인천은 빠르게 변모하며 근대도시의 면모를 갖춰나갔다. 근대식 구조물이 등장하고, 최초의 철도 부설, 최초의 우편업무 등 최초 수식어가 늘기 시작했다. 작은 포구는 근대도시, 관문도시로 변했고, 초가집 50여 채, 배 몇 척밖에없던 작은 항구에는 변화의 바람이 불어왔다. 수도 서울과 가까운 지리적 강점으로 인해 많은 배가 인천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이병헌과 김태리가 출연한 tvN 드라마 ‘미스터션샤인’에 나왔을 법한 수많은 근대 건축물이 이 지역에 들어섰다. 


1900년대 초에는 영사관 3개, 극장 2개, 은행 7개와 목욕탕, 교회, 호텔 등이 세워졌고, 개항장 거리는 금융과 상업 중심지로 성장해갔다. 개항은 작은 포구를 거대한 항구도시, 국제 무역항으로 변신시켰다. 인천은 한국 근현대사와 함께한 교통의 요충지였다. 6·25전쟁의 포화가 한반도를 뒤덮었을 때 전세를 뒤집은 상륙작전도 인천이 시작이었고, 이어진 재건과 개발 붐이 일 때도 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경인선은 서울지하철 1호선과 연결됐으며, 1999년에는 인천 지하철 시대가 열렸다. 2001년 인천국제공항이 개항하면서 동아시아의 관문이 됐다. 빠르게 성장하던 인천은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의 팽창 속에 예기치 못한 부작용을 겪기 시작했다. 원도심의 쇠락과 유동인구 감소, 그에 따른 상권의 붕괴가 나타났다. 140여 년 전 인천의 중심지였던 개항장 거리는 많이 축소됐고, 인천의 중심지 타이틀을 새롭게 등장한 송도 신도시 등에 내줬다. 개항의 시작지 인천과 제물포는 시대의 변화와 함께 새로운 선택에 나섰다. 제물포 르네상스로 명명한 제2의 개항이다.

최초의 우편 업무도 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에서 이뤄졌다.
최초의 우편 업무도 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에서 이뤄졌다.

신문물 시작점에서 골칫거리로 전락한 내항에서 부는 바람

 

개항의 중심지 인천이 남긴 가장 아픈 손가락은 바로 인천 내항이다. 인천 내항은 한때 대표적인 국제무역항으로 명성을 떨쳤다. 1918년 동양에서 최초로 건설된 이중 갑문식 독이었고, 이후 전성기를 누렸다. 하지만 많은 전통산업이 그렇듯 인천 내항도

2000년대 이후 급격하게 쇠퇴했다. 이는 선박 규모의 변화가 큰 요인이었다.


현재 남아 있는 근대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구 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

현재 남아 있는 근대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구 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

인천 내항은 5만 톤급선박이 입항할 수 있는 항구로,예전에는 5만 톤이면 충분했다. 하지만 글로벌 교역이 증가하고 기술이 발전하면서 선박의 크기도 커졌다.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10만톤, 20만 톤급 컨테이너선 중심으로 흐름이 넘어갔고, 컨테이너 중심의 항만이 생기면서 인천 내항은 그 기능을 사실상 상실한 것이다. 인천 내항이 쇠퇴하면서 이곳 시민들의 삶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항구와 주변 시설물 탓에 육지 속 의 작은 섬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무역항으로 위세를 떨치고, 사람과 물자가 몰리는 교통의 요지였기에 시민들은 그곳을 지키며 살아왔다. 그러나 인천 내항이 세월 앞에서 애물단지로 전락하자, 시민들은 더 이상 그곳에 머물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쇠퇴한 이 항구를 어찌한단 말인가? 이에 인천시가 나섰다. 항구의 철책선을 거둬 바다를 시민에게 돌려주기 시작했다. 만석부두와 화수부두는 실제로 만석화수 해안산책로로 변화했다. 지난 2018년 4월에는 7부두 곡물 사일로에 벽화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사일로 슈퍼그래픽 조성 사업으로, 기네스에 등재된 세계 최대 야외 벽화로 인증받았다. 근대의 기억과 추억을 미래로 바꾸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해외에는 이러한 성공사례가 이미 많이 있다.







기사 전문은 <XITY> 매거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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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ditor HAN DAEH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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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6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인천상륙작전의 주역인 맥아더 장군이 UN 사령관직에서 물러나면서 남긴 말이다. 그렇다. 오래된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마냥 사라지기엔 아까운 것이 많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충분히 조화를 이룰 수 있다 .

도시 역시 마찬가지다. 무역의 중심지였던 인천 항구도시는 지난 몇 년간 새로운 변화에 직면했다. 그렇다고 마냥 부수고 없앨 수는 없기에 조화를 이룬 재생사업이 조명받고 있다. 독일 함부르크가 그랬고,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이 그랬다. 이제 인천 차례다. 

일본과 청나라의 초계지


‘최초’의 타이틀을 가장 많이 갖고 있는 도시를 아세요?


19세기 말 조용한 포구가 격랑에 휩싸였다. 1883년 개항과 함께 외세에 의해 제물포항이 개방되면서다. 1876년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개항을 강요했다. ‘조일수호조규’에 따라 부산과 원산 그리고 인천이 개항됐다. 한반도를 노리던 일본은 철저하게 준비했다. 정식 개항 1년 전인 1882년 영사관을 지었다. 이후 일본 영사관을 시작으로 청나라, 러시아 영사관이 속속 들어섰다.


이들은 영사관을 중심으로 치외법권 지역인 조계지를 설정했다. 이후 서구 열강도 조계지를 차지하면서 인천은 열강의 각축장이 됐다. 일본 조계지는 약 1만 평으로 청나라의 두 배였다. 지금도 개항장 거리에 가면 일본과 청나라의 조계지가일본과 중국의 문화를 간직한 채 어색한 동거를 하고 있다. 서구 열강의 조계지는 총 14만 평 규모로 외형상으로는 크지만 가장 요지는 일본이 선점했다. 이권의 침탈을 두고 논의하던 자리가 우리나라 최초의 사교클럽이었던 제물포구락부였고, 제물포구락부는 열강의 한반도 침탈을 상징한다.


개항 이후 인천은 빠르게 변모하며 근대도시의 면모를 갖춰나갔다. 근대식 구조물이 등장하고, 최초의 철도 부설, 최초의 우편업무 등 최초 수식어가 늘기 시작했다. 작은 포구는 근대도시, 관문도시로 변했고, 초가집 50여 채, 배 몇 척밖에 없던 작은 항구에는 변화의 바람이 불어왔다. 수도 서울과 가까운 지리적 강점으로 인해 많은 배가 인천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이병헌과 김태리가 출연한 tvN 드라마 ‘미스터션샤인’에 나왔을 법한 수많은 근대 건축물이 이 지역에 들어섰다. 1900년대 초에는 영사관 3개, 극장 2개, 은행 7개와 목욕탕, 교회, 호텔 등이 세워졌고, 개항장 거리는 금융과 상업 중심지로 성장해갔다. 개항은 작은 포구를 거대한 항구도시, 국제 무역항으로 변신시켰다.



최초의 우편 업무도 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에서 이뤄졌다.


인천은 한국 근현대사와 함께한 교통의 요충지였다. 6·25전쟁의 포화가 한반도를 뒤덮었을 때 전세를 뒤집은 상륙작전도 인천이 시작이었고, 이어진 재건과 개발 붐이 일 때도 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경인선은 서울지하철 1호선과 연결됐으며, 1999년에는 인천 지하철 시대가 열렸다. 2001년 인천국제공항이 개항하면서 동아시아의 관문이 됐다. 빠르게 성장하던 인천은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의 팽창 속에 예기치 못한 부작용을 겪기 시작했다. 원도심의 쇠락과 유동인구 감소, 그에 따른 상권의 붕괴가 나타났다. 140여 년 전 인천의 중심지였던 개항장 거리는 많이 축소됐고, 인천의 중심지 타이틀을 새롭게 등장한 송도 신도시 등에 내줬다. 개항의 시작지 인천과 제물포는 시대의 변화와 함께 새로운 선택에 나섰다. 제물포 르네상스로 명명한 제2의 개항이다.


현재 남아 있는 근대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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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물 시작점에서 골칫거리로 전락한 내항에서 부는 바람 


개항의 중심지 인천이 남긴 가장 아픈 손가락은 바

로 인천 내항이다. 인천 내항은 한때 대표적인 국제

무역항으로 명성을 떨쳤다. 1918년 동양에서 최초로 건설된 이중 갑문식 독이었고, 이후 전성기를 누렸다. 하지만 많은 전통산업이 그렇듯 인천 내항도2000년대 이후 급격하게 쇠퇴했다. 이는 선박 규모의 변화가 큰 요인이었다. 인천 내항은 5만 톤급선박이 입항할 수 있는 항구로, 예전에는 5만 톤이면 충분했다. 하지만 글로벌 교역이 증가하고 기술이 발전하면서 선박의 크기도 커졌다.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10만 톤, 20만 톤급 컨테이너선 중심으로 흐름이 넘어갔고, 컨테이너 중심의 항만이 생기면서 인천 내항은 그 기능을 사실상 상실한 것이다.

인천 내항이 쇠퇴하면서 이곳 시민들의 삶에도 큰변화가 생겼다. 항구와 주변 시설물 탓에 육지 속의 작은 섬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무역항으로 위세를 떨치고, 사람과 물자가 몰리는 교통의 요지였기에 시민들은 그곳을 지키며 살아왔다. 그러나 인천 내항이 세월 앞에서 애물단지로 전락하자, 시민들은 더 이상 그곳에 머물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쇠퇴한 이 항구를 어찌한단 말인가? 이에 인천시가 나섰다. 항구의 철책선을 거둬 바다를 시민에게 돌려주기 시작했다. 만석부두와 화수부두는 실제로 만석화수 해안산책로로 변화했다. 지난 2018년 4월에는 7부두 곡물 사일로에 벽화가 그려 지기 시작했다. 사일로 슈퍼그래픽 조성 사업으로, 기네스에 등재된 세계 최대 야외 벽화로 인증받았다. 근대의 기억과 추억을 미래로 바꾸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해외에는 이러한 성공사례가 이미 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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